어둠의 심연에서 무엇을 볼까-소설 <암흑의 핵심>(1899)과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읽기 전 나는 대학에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았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강 하류에서 시작해 상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윌라드의 여정을 통해 베트남전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원작으로 하며 두 작품 모두 암흑의 중심에 있는 미지의 인물 커츠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음악 왈큐레의 기행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바그너의 음악이 영화에서 어떻게 베트남 민간인 학살 장면에서 사용되는지 설명을 들었고, 예술의 미학이 폭력의 광기를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에 숨기고 황홀감에 다가갈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인간의 윤리적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벌어지는 폭력과 광기가 휘몰아친 뒤 찾아오는 공허감은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 베트남전 중 탈영한 커츠 대령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윌라드가 전쟁의 표면에서 시작해 상류로 다가갈수록 전쟁의 부조리한 실상을 목격하고 자신의 부대원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 윌라드는 베트남전이라는 인간의 광기가 한 점에서 폭발한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눈에는 베트남 인민해방이라는 자유의 이념도 찾아볼 수 없고 폭력의 정당성도 없는 현장에서 미국 군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허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베트콩 마을을 학살하는 길 고어 대령은 이미 베트남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가 그 세계 내에서 존재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표출하는 광기로 읽을 수 있다. 또한 강 상류로 진입하는 관문에 도착한 윌라드가 베트콩과 대치 상황에서 지휘관도 없이 공중에서 총을 쏘는 미군의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은 전쟁의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목적도 없는 하늘 암흑의 중심으로 쏘아대는 총은 대체 무엇을 향해 총성을 울리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전쟁의 한복판에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식민주의 무리까지 있다.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농장을 사수하려는 프랑스 농장주의 모습은 남의 땅을 찬탈하고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갖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강 하류에서 시작해 동료들의 희생을 통해 상류에 도착한 윌라드는 점령지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커츠 대령을 만난다. 포로로 잡혀 끌려온 윌라드는 커츠의 고백을 통해 왜 그가 부대에서 탈영했는지 이유를 묻는다. 커츠는 미군 부대 수용소에 갇힌 베트남 아이들이 미군이 예방접종해준 팔을 베는 것을 보고 순수한 공포를 느낀다. 커츠의 공포는 베트남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 아이들의 팔을 자르는 결과로 돌아오는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발생한다. 무의미한 추상적 이념 때문에 무수한 인간이 살육당하는 전쟁의 참상, 그리고 현지 아이들까지 거부하는 전쟁을 왜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커츠는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커츠가 자신의 죄의식을 윌러드에게 고백하고 그가 공감해주길 바랄 때 이미 커츠는 영화 초반에 상상된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사실상 커츠는 윌러드를 죽일 수 있는데도 내버려둠으로써 자신을 암살하기를 기다린다. 급기야 윌러드가 결단을 내려 커츠를 암살할 때 거대한 폭력 뒤에 숨어 오히려 폭력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무능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그렇다면 영화의 원작인 소설 암흑의 핵심은 어떨까? 이 작품은 마로라는 인물이 나라는 인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돼 있다. 이 작품은 실제 콘래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적 소설로 그는 1890년 아프리카 콩고에서 선장으로 항해한 바 있다. 그는 콩고 항해를 통해 목격한 사실을 마로라는 인물의 고백을 통해 작품화한 것이 바로 《암흑의 핵심》이다. 이 작품도 평소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선원이 되고 싶었던 말로가 모 기업의 증기선 선장이 돼 커츠를 본부로 귀환시키기 위해 강 상류로 여행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이 작품에서 마로의 시선에 비친 암흑의 세계는 생명력으로 불타오른다. 구불구불한 나선을 그리며 뱀의 꼬리를 닮은 강의 모습은 위험하고 불안하지만 신비로운 생명력과 심연을 간직한 세계다. 그러나 암흑의 중심에 침입해 상아를 탈취하려는 백인들은 원주민을 교역 과정에서 계몽시키려 하고 몇몇 원주민을 자기 종으로 삼는다. 이성의 빛으로 암흑을 문명의 세계에 계몽시킨다는 백인의 이념은 원주민을 자신들의 씨앗으로 만들고 암흑이 간직한 생명력을 상아라는 상품으로 물질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백인의 이중적 시선에 대한 거부감이 말로의 언어를 통해 소설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의 주인공인 마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는 백인들의 가식적 태도에 불만을 느끼고, 문명화된 원주민들이 모습에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커츠라는 인물에게 기이한 동일시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말로의 항해는 상류에 도달할 때까지 어떤 신화적 열정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고, 그는 암흑의 중심에서 영웅처럼 회자되는 커츠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실제로 소설 속 커츠는 시를 읽고 타인에게 기이한 열망을 불어넣어 유럽 문명을 미개척 지역으로 전파하려는 사상가로 그려진다. 과연 백인들의 가식적 태도에 대한 거부감과 커츠에 대한 동경이라는 이 불일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처럼 이 작품의 해석이 복잡해지는 것은 바로 ‘마로’라는 인물의 복잡함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와 소설의 차이는 커츠라는 인물의 성격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커츠는 암흑에 가려진 진실의 목격자라면, 소설 암흑의 핵심에 등장하는 커츠는 문명으로 원주민을 계몽하려는 식민주의적 제국주의 사상가이자 원주민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읽기 전 나는 대학에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았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강 하류에서 시작해 상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윌라드의 여정을 통해 베트남전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원작으로 하며 두 작품 모두 암흑의 중심에 있는 미지의 인물 커츠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음악 왈큐레의 기행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바그너의 음악이 영화에서 어떻게 베트남 민간인 학살 장면에서 사용되는지 설명을 들었고, 예술의 미학이 폭력의 광기를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에 숨기고 황홀감에 다가갈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인간의 윤리적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벌어지는 폭력과 광기가 휘몰아친 후 찾아오는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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